알고보니 포르투갈은 파두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더이상 파두를 듣지 않는다. 

파두 클럽에는 노신사와 숙녀, 

그리고 역시나 나이 지긋한 여행객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파두의 나라였기 때문에, 

그 사우다지(saudade)를 느껴보고 싶어 
떠났던 여행이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의 젊은이들은 
훨씬 더 다양한 전통들을 흡수해

새로운 음악들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일렉트로니카와 아프리카 뮤직, 

그리고 파두의 전통과 집시 음악, 

이웃 나라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영미권의 팝음악까지 흡수하면서 

훨씬 더 생기있는 음악을 거리 곳곳에서, 

그리고 그들만의 클럽에서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나 
크리스티나 브랑쿠보다

마드레데우쉬와 둘세 폰테쉬가 
아마 포르투갈 음악의 현재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파두와 사우다지는 
이제 더이상 삶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

그저 포르투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실제적인 힘을 갖는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포르투갈 사람들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 

이른바 ‘대항해 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된 먼 곳으로의 동경과

이제는 옛 영화가 되어버린 그 시대에 대한 

쓸쓸하지만 도도한 향수가 어우러진, 

도시의 건물과 그 옆을 흐르는 강물, 

바람과 바다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그들만의 향기라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추측도 가능할테다. 

이제는 전설이 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그들이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섞여 있다. 

살라자르의 장기독재 정권이 파두를 후원하면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일종의 '문화대사' 역할을 했던 것. 

어쩌면 파두를 떠올릴 때 
그런 씻고 싶은 과거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제 파두는 흘러간 옛노래, 

우리로 말하자면 ‘가요무대’에 나올 법한 

유성기 시대의 트로트라고나 해야 할까, 

생생한 현재를 보여주는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리스본에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에

그렇게 바래져가는 무엇과도 같다. 


그렇기에 파두는 어쩌면 그 자체로 
‘사우다지’의 대상이 되는 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이제 다시 손을 댄다면 
한 줌 가루로 바스라질 듯한 음악. 

‘사우다지’를 노래했으나 
이제는 그 자신마저도 

추억과 향수의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 

그런 음악.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