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또는 일상의 고고학.
발견과 발견,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발견.

이를테면 먼 훗날 로제타 스톤으로 기억될 지도 모르는.
우리 이 진부한 삶의 소소한 기록들.











떠도는 것은 숙명이다
이십여년 전 점집에서 들은 후로
늘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저 연기하는 어릿광대들
그러니 위험과 모험을 한껏 즐겨도 좋다

오딧세우스의 기약없는 여행과도 같은 방황을
당신의 운명으로 승복한다 해도
늘 같은 자리에서 피고지기를 반복하는
꽃의 그림자와 같을 뿐

이 짧고 덧없는
한순간의
生은,






대한민국은 공사중입니다.

임시로 세운 벽에 낙서가 눈에 띕니다.
곧 공사가 끝나버리면 저 글자들도 사라지겠지요.

대한민국은 공사중입니다.
전 국토가 개발의 이익에 눈먼 자들에 의해
난도질 중입니다.
그 공사가 끝나면 숱한 생명들도 사라질 겁니다.

촛불은 에너지이다,
이제 딱
한달 남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게 될까요.








오래된 집에는 불온한 유언비어 같은 균열,

어쩌면 나무는 하늘에 그어진 균열이다


모든 균열은 빛을 향해 자란다








Fuji TX-2 with 45mm
Kodak Gold 100 (expired at 4 years ago)


여자는 문득 멈춰 생각에 잠긴다. 

때로 어떤 기억들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깊숙한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처럼, 종종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기억.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을까? 혹은, 전혀 모르는 남이었을까? 

사실 사진이란, 아주 일부분의 진실일 수밖에 없다. 

모든 장면, 모든 시간, 모든 여기-이곳(hic et nunc)은

담길 수 없다. 진실보다는 과장된 현실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러니 여자가 남자를 알았는지, 혹은 알고 싶어했는지, 

시간의 앞과 뒤도, 공간의 앞과 뒤도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무한히 상상될 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사진의 매력일 수 있다. 

그런데 어쨌든 이 풍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자의 심리상태보다는, 

저기 유령처럼 미세한 흔적만을 남기며 지나가는 남자다. 

남자는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남자들은 늘 그렇다. 

소중한 무엇이 곁에 있음을 망각하고, 늘 다른 곳을 찾아 방황한다. 

언제나 남자들은 어딘가에 그 자신만의 섬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은 어쩌면 이 지긋한 일상에서 화면 속의 남자처럼 실체라기보다 그림자와도 같이, 

그저 여성들의 세계에 일종의 유령으로서 연기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남자를, 여자는 과연 뒤돌아볼까? 

따라올까, 그도 뒤돌아볼까, 그가 아는 사람이었을까... 이 망설임의 순간들, 

만약 뒤를 돌아보게 된다면 되돌릴 수 없을 미지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 같은 순간이다. 

남자의 발길은 단호하지만, 여자는 우두망찰 길 위에 멈춰 생각에 젖는다. 


오르페우스나 롯의 아내가 돌아보았을 때 

그들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은 호기심과 모종의 불안함,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려는 용기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여자는 과연 뒤를 돌아보게 될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겨울날의 청계천변, 그렇게 길 위에서 엇갈려 간다. 

태곳적부터 여자와 남자가 그랬듯이.



청계천, 서울, 2006 | Kodak TMY 



1. 코맥 매카시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
영화라는 매체에 기대하는 대중의 심리는
대개의 경우 권선징악 내지는 해피엔딩이기 때문에
원작보다는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희망에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부담스럽고, 
보는 내내 묵지근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게 되지만. 

2. 신 - 일라이 - 엘리
이 영화(소설)에서 이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영화 중반쯤에 나오는 노인 뿐이다. 
영화에서는 자막으로 "일라이"라고 표기되지만, 
그리고 영미권에서의 발음 역시 일라이에 가깝지만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 있는 것은 "엘리"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늘에,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 말했다는 이 문장은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 노인 혼자만이 
다른 여타의 인간과 구분되는 존재라는 뜻. 
이름을 가지는 것은 곧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OO가 XX라고 말했다, 고 이야기하려면 OO, 
 다시 말해 이름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남자가 노인('엘리')에게 아들에 대해 물어보자,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차마 얘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당연하게도 대속자(代贖者)로서 지상에 와 인간들 대신 목숨을 내어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종말을 초래한, 
인간들에 대한 원망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신은 없거나(니체 말에 따르면 죽었거나), 
혹은 더이상 인간들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
심지어 영화에서 기도는, 
신을 향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people)을 향해 이뤄진다.


3. 자본주의
이 영화와 자본주의를 연결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맞다. 
영화는 설명되지 않은 어떤 사건인가에 의해 종말이 다가온 이후,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은 극단적인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외면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잡아먹는 영화(및 소설) 속의 상황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실제로 잡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늘 자본가가 노동자를,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비정규직이 이주 노동자를, 이주 노동자가 불법 이주 노동자를 
희생시키면서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올라가려는 건, 
그렇다면 '잡아먹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더구나 카트, 분명 노숙자에서 모델을 따왔을 이 물건은
자본주의적 소비체제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아니던가. 
카트에 뭔가를 담을 수 있는 자가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도 '자본주의까지 연결하는 건 무리잖아'라고 생각하신다면, 
한겨레21의 기획연재, 노동OTL을 클릭해보시길 권한다. 

4. 홉스
그래서 우리는 홉스의 유명한,  
homo hominis lupus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라는 구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명제는 어떤 면에서는, 
그저 현실이 그러하니 강자가 되라는 의미 보다는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늑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회와 공동체가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원래 인간이 늑대니까, 라고 남들을 짓밟기보다는
영화(및 소설) 속 아이처럼 
남들과 함께 가려 하고, 남들에게 뭔가를 나눠주려 하는 것이
이 명제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인지도 모른다. 

5. 가족
하지만 공동체란, 사회란, 
우리 뜻대로 움직여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있다. 
그걸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쁜 사람'을 모두 없애버리면 세상이 좋아질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타인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어떤 가족이든 가족, 만이 신뢰의 최소 구성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혈연에 의한 가족이든
아니면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일종의 '대안 가족'이든. 

6. 불
불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결국 희망은 '불'이다.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상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이다. 
(프로메테우스, 또는 영화 "불을 찾아서"를 상기하라),

사실 '남쪽'으로 간다한들, 
과연 전지구적인 파멸에 '남쪽'이라고 무사할 리는 없겠지만, 
실제로 물리적인 '불'이었든 
아니면 (영화에서 그렇듯) 가슴 속에 남아있는 
온기어린 '불꽃'이었든 간에
'불'을 간직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 막막한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그리고, 힌두 신화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불교와 동양철학을 상기한다면
늘 창조는 파괴 뒤에 오기 마련이다. 

7. 닉 케이브
영화음악은 닉 케이브가 담당했다. 
비고 모르텐슨이나 소년 역의 코디 스미스 맥피, 
샤를리즈 테론과 로버트 듀발 등의 배우 캐스팅도 좋았지만, 
이 침울한, 그러나 최소한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음악을 누군가 맡아야 한다면
닉 케이브 이상으로 어울리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닉 케이브 자신이 "더 로드"의 이미지 아니던가. 

그러나 굳이 토를 달자면, 
이 영화는 코맥 매카시 원작의 또다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듯
음악을 쓰지 않고 만들었다면 더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먹먹한 영화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음악을 썼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내게 열정적으로 말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반짝거리며 흘러가는 저 시간들은 더이상 내것이 아니다

당신을 기다린 것은 꽤 오래 되었으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걸음마저 이즈음의 내 삶에는 사치인 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출발과 도착의 명멸하는 순간들을 응시할 뿐,
기적(汽笛)은 비루하고 진부한 혁명과도 같았다



2009. 9. 19. Sat ~ 2009. 9. 20. Sun


나는 이별에 서툴다. 

아니, 어쩌면 만남에 서투른 지도 모른다. 

만나서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리니

다시 마음을 접어야 할 때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여행에서 어떤 도시와 나라를 만나는 것은

늘 마음을 접어야 할 이별의 시간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무기한 
세계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리스본’이라는 영어식 표현을 썼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은 리스보아(Lisboa)라고 부른다. 

살짝 스치듯, 안으로 궁글리는 소리로 
‘...보아’라고 끝나는, 

리스보아, 의 발음을 듣고 있으면

왜 포르투게스를 유럽어 중에 
가장 발음이 아름답다고 하는지 이해가 된다. 


여행 아흐레째가 되어서야, 
이렇게 떠날 때쯤이 되어서야 

리스본은 ‘리스보아’가 되고 
‘Thank you’는 ‘오브리가두(Obrigado)’가 되며

‘Bye’는 ‘아데우시(Adeus)’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포르투를 떠나 리스본으로, 

다시 이튿날이면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포르투의 마지막 날. 




포르투에서 출발한 열차는, 

리스본의 아폴로니아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리스보아에서의 마지막 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트램에 몸을 싣고 멍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가끔은 미처 구경하지 못한 곳이 눈에 띄면

얼른 내려 잠시 산책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발길은 아우구스타 거리와 

코메르시우 광장을 향한다.  




포르투갈, 그리고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 건너왔을 것이 분명한 청년 두 명이

어느 박물관의 Africa 전시회 광고 문구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산타 주스타의 엘리베이터와 골목에도 

기울어가는 햇살이 드라마틱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왠일인지 약국 간판에는 온도계가 설치돼 있고.



누군가의 낙서는 사람들에게 실없는 웃음을 던져주는 곳.



그리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곳 역시,

리스보아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에

밤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쉬운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일요일 아침 8시 비행기. 

호텔 숙박비에 포함된 
조식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공항으로 향한다. 


아마 내가 포르투갈을 처음으로 접한 건, 

어릴적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을 때였을 것이다. 

제제가 많이 따랐던 (그러나 사고로 숨진) 아저씨가 
포르투갈 출신이었고,

그래서 별명이 ‘뽀르뚜까’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두를 듣다가 갑자기 떠나고 싶어져서, 

그리고 유럽의 최서단에 위치한 호까곶에서

대서양을 바라보고 싶어 갔던 포르투갈. 


열흘의 일정은 그렇게나 빨리 흘러갔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3,000여장의 사진과 어느덧 희미해져 가는 기억,

그리고 몇가지 기념품들 뿐. 




나는 여전히 이별에 서툴다. 

떠나온 지 두달도 더 된 이 나라에 

여전히 미련과 아쉬움이 많이 남았는가 보다. 

여행기가 이리도 오래 걸린 이유에는

내 게으름도 한몫 했지만, 

작별의 타이밍을 잘 찾지 못하는 

내 성정도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낯선 매력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1년쯤 머물렀으면 좋겠다. 

그러면 리스본과 포르투,

그 골목길들에 두고 온 마음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리라.  

 


2009. 9. 19. Sat.


아무래도 포르투의 마지막 아침을 

그저 기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갈음하기에는, 

내가 포르투에 너무 깊숙이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랑스러운, 
고풍스러운 도시의 매력이란!






그래서 짧은 일정 탓에 미뤄놓은, 

‘도우루 강의 뱃놀이’를 하기로 결정.




강을 낀 도시라면 으레 유람선이 있기 마련. 

파리에서 탔던 므슈 바토도 그랬고, 

한강 유람선도 마찬가지일테다.

어떤 면에서는 강을 따라 그 도시를 맛본다는 건

그 도시가 형성된 과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행위일 것.






도우루강의 보트는 대개 9시부터 5시까지, 

한시간 간격으로 배를 띄우고 있었다. 

약간의 기다림, 그리고 설렘.



배를 탈 무렵엔 하늘이 좀 컴컴해졌고, 

빛은 조금 더 드라마틱해졌다.








곳곳에 카누를 타는 사람들과, 

강 한가운데 있어야 눈에 띄게 마련인 풍경들과, 

배를 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 





남들이 한다고 모두 따라서 해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도시든 남들이 해보는 건 
꼭 해봐야 하는 게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이른 아침의 도우루강의 뱃놀이 같은. 





2009. 9. 18. Fri.


살다보면 그런 법이 있는 것이다. 

내용은 얼마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서너 배는 되는 경우.


나의 포르투갈 여행 역시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 

겨우 열흘의 일정이었으나 
여행기는 하염없이 늘어진다. 

대개는 나의 게으름이 원인이겠지만

어쩌면 이 여행기를 끝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내 마음 속 포르투갈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도.




이틀 전 얼떨결에 들어간 숙소, 

사흘째에는 그나마 방을 바꿔야 하는 불편함이 따랐으나

오히려 바꾼 방이 보다 아늑해서 좋았다.



오후에 방을 바꿔 짐을 대충 정리한 뒤,

다시 역사지구로 발길을 돌린다.





사실 아무리 내가 ‘관광’보다 ‘여행’을 지향한다지만,

대개 첫 이틀은 정신없이 관광지들을 돌아다니게 된다. 

대충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고 난 후 여유로움이

오늘 올리는 사진들에는 짙게 배어있다.





그 전날 주교좌성당(Sé) 내부는 들어가 보지 않았기에,

Sé를 다시 가보기로 결정.






늦은 오후의 낮은 햇빛이 성당에 스며든다. 



그리고 원형 창을 통해 빚어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





로마네스크 양식의, 

11세기부터 13세기 걸쳐 지어진 이 성당의 

가장 눈에 띄는 랜드마크는 바로 이, 
두개의 탑이다. 





그리고 성당 내부의 전시물들도 볼 만 했고.




Sé에서 도우루 강으로 내려가는 길고 긴 계단에서, 

이국의 눈빛을 가진 갈매기들을 만난다.







마치 오래된 추억처럼 

포르투는 지금도 그렇게,

바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아래의 Hot Five는

Sé 근처에 있는 나름 유명한 재즈 클럽이지만, 

하필이면 내가 간 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시내 중심가로.


내가 머무른 호텔 근처에는 

주말이면 이렇게 젊은 연주자들이 나와 공연을 펼쳤다.



선뜻 들어가보지 못한

대형 극장도 지금은 아쉬움으로 남고.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사실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제 이튿날이면 리스본으로 향해야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야하는,

정말 돌아오기 싫었던 포르투의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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