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5. Tue.


리스본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거쳐가는 곳, 

신트라.


무어인의 시대부터 시작해 포르투갈의 수복 뒤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들로 이용되기도 했고,

고딕과 무어인들의 양식, 중국과 인도의 장식들이 뒤섞여

독특한 이국적 풍경을 낳는 곳이 바로 
신트라다.


그리고 신트라 궁과 페나 궁을 방문하면서 비로소,

내가 리스본에 도착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를 알게 됐다.

혼성모방과 키치.


자세한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리스본에서 신트라로 가려면 

대개 호씨우(Rossio) 역을 이용한다. 

10분 정도 간격으로 출발하는데 대략 50분 가량 걸린다. 

아래는 신트라 기차역.



신트라 기차역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버스 정류장과 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소에서 충분히 설명을 듣고나면 

신트라의 관광지 순환버스를 타게 될 것이다. 

(그게 여러모로 보아 합리적이기 때문인데 

신트라역-신트라궁-무어인의 성-페나궁-
신트라궁-신트라역, 이 순서로 운행한다.)


이 곳에서 (나중에 이야기할) 
호까 곶(Cabo da Roca)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기도 하는데,

순환버스로 한 정거장을 이동하면 나오는 신트라 궁에서도

신트라-호까 곶 순환버스가 출발하니 
선택하기 나름이겠다. 

(대개 신트라 관광 안내소에서 출발해서, 
돌아올 때는 신트라 역으로 돌아오는 게 낫다.)


그래서 어쨌든 도착한 신트라 궁. 

웬만한 블로그나 카페 등에 너무 잘 알려진 

오른쪽의 원뿔형 굴뚝은 

좀 진부한 감이 없지 않지만, 

역시 사진으로 보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감동의 크기가 다르기 마련이다. 

(이 역시 진부한 말이기는 하지만.)




입장료는 리스본 카드가 있으면 할인/무료다. 

심지어 앞에서 본 리스본-신트라 간 기차도 

리스본 카드가 있으면 프리 패스고, 

신트라 순환 버스와 호까곶 순환 버스 역시 무료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 자체로도 독특한 양식들이

한 곳에 뒤섞이다보니 

외벽도 그렇고 내장도 그렇고

뭔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건축 스타일이다. 






아래에 보이는 타일 역시 일종의 아줄레주.



모름지기 건축이란 

인공 조명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를 본다면

빛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빛과 색채의 드러남,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교차.



아래에 보이는 것이 유명한 ‘백조의 방’ 천장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좀 어설프다. 

리스본이라는 도시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



백조의 방(Sala dos cisnes) 이외에도 
까치의 방(Sala dos Pegas)이나

아랍의 방(Sala dos Árabes) 등 여러개의 방이 있었으나, 

일일히 소개하기는 좀 번거로우니 사진 몇 장만 더 올린다.





그리고 굴뚝. 

사실 루브르가 모나리자의 공간이라면

신트라 궁은 저 굴뚝의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굴뚝의 내부를 보기 위한 기대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다시 밖에서 본 굴뚝.


그리고 멀리, 

무어인의 성이 보인다. 



산기슭에는 다른 궁궐같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다시 신트라 궁 안으로 눈을 돌리면, 





나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보니

아기자기한 재미는 있다. 

그리고 이런 과장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호감이 갈 만한 건축물이다. 



멀리서도 역시 인상적인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는 

신트라 궁의 굴뚝.





그리고 신트라 궁 앞의 거리들.

영국 시인 바이런이 신트라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던데, 

그래서 이런 간판도 있었다.




신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과자, 

트라베세이루(travesseiros)와 케이사다(keijada)는 
꼭 먹어봐야 한다. 

먹는 걸 사진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링크로 대신하지만 

특히 트라베세이루는 말 그대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 


간단히 에스프레소와 트라베세이루 두 조각을 먹은 뒤 

무어인의 성으로 출발.



2009. 9. 14. Mon.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어떤 도시든 웬만하면 이틀 이상 머무르는 편이다. 

2004년 파리의 경우는 7박 9일의 일정 내내

파리 한 곳에만 머물렀고 

이번 여행 역시 리스본(신트라를 포함한)과 포르투, 

딱 두 도시만으로 열흘의 일정을 잡았다. 

물론 중간에 코임브라를 갈 것이냐를 놓고 
한참 고민했지만.


아무튼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에는 
체력이 달려서일 수도 있겠고,

하나의 도시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게 
더 재미있어서일 수도 있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떤 도시든 사실은 1주일 정도는 머물러야

그 도시의 어렴풋한 윤곽이라도 파악된다는 게 
내 생각.


리스본의 사흘 째 밤이다. 

무릇 어수선한 도시일수록 야경이 빛나는 법이다. 

높이 솟은 타워크레인과 
너저분하게 떨어져 나간 건물의 페인트,

깨진 유리창과 무질서한 모든 것들이 어둠 속으로 잠기고

인공조명 만이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그게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야경이 
멋져 보이는 이유다.


리스본은 약간 다른 의미에서,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의미에서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위 사진들은 산타 주스타의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에서 찍었다.

앞에 보이는 길이 Rua de Santa Justa이고, 

멀리 산자락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성 조르지 성(Castelo do São Jorge)이다.

오순도순 늘어선 카페의 천막이 다정한 도시.


한편 이 엘리베이터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이건 반쯤 폐허가 된 
카르무(Carmo) 수도원 쪽에서 찍은 사진.



사실 이렇게 전형적인 관광 명소는 

잘 찾지 않는 편인데, 

그런 일종의 습관, 보다는 편견에 가까운 습벽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이번 기회에 드러났다. 

참고로 이 탑의 설계자인 
라울 메스니에 데 퐁사르(Raul Mesnier de Ponsard)는

에펠탑의 설계자인 귀스타브 에펠의 제자다.



아무리 찾아도 이 엘리베이터의 전경을 잡은 사진이 없다. 

좀 아쉽지만 입구 부분의 사진으로 대체. 



사실 이 탑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라는 이름 이외에도

카르무 엘리베이터란 이름이 존재하는데,

이유인즉슨 이 엘리베이터 바로 뒤에 

카르무 수도원(Convent da Ordem de Carmo)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수도원은 1755년 대지진으로 
반쯤 파괴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글판 가이드에 소개돼 있지만, 
그냥 찾으려면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특히 밤에 찾은 이 수도원의 흔적과 자취는 매우 아름답다.  





수도원이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었다면 
어쩌면 덜 흥미로웠을 수도 있겠지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의 뼈대만이 남아 있으니

오히려 그 구조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달까.





이로써 사흘째 리스본의 밤이 지나간다. 

이튿날인 9월 15일, 화요일은 드디어 신트라로 출발할 예정.

마지막으로 리스본의 야경 사진 하나 더 올리고 

다음 포스트를 기약한다.



2009. 9. 14. Mon.


어쩌면 타임 랙(time lag)이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반드시 공간적인 이동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곳에서의 시간으로 변환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종의 타임 랙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내 경우 리스본은, 
이제 사흘째 오후가 되어서야 익숙한 무엇, 
호감이 가는 무엇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성 조르지 성(Castelo de São Jorge)을 찾으면서부터.


리스본이 전설에 따르자면, 

오딧세우스가 발견했다고 한다지만
전설이요 신화니 그렇다 치고,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 땅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페니키아 인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로마인과 무어인들, 
여러 종족들이 번갈아 가며 이 땅을 이용했다. 

강을 굽어보는 언덕이라는 천혜의 지리조건 때문이다. 



나름 성을 찍어보겠다고 했으나 

사실은 저 초로의 남성에게 눈이 갔고, 

결과는 사진에 보시는 그대로다. 

어쩌다보니 성의 전경사진이라기보다 

아저씨의 여행 사진이 되어버렸다.

난 그게 더 마음에 들지만.




성 안에는 이곳에서 발견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돼 있고,

성의 역사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성도 성이지만 여행은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성을 들어서자마자 울리는 클래식 기타의 음향, 

옛 성곽 벽에 기대어 듣는 음률은 
천상의 그것인 양 아름다왔다.


이윽고 다가가 
기타리스트가 앞에 내어놓은 CD를 두 장 집어들자,

뒤적뒤적, 개인적인 CD 한 장을 찾아
더 얹어주는 센스까지.

리스본에 반은 심드렁하고 반은 어리둥절하던 차에,

이 무명의 기타리스트 덕분에 
리스본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한다.


참고로 이 아저씨, 
나름 홈페이지까지 운영하는 기타리스트다.

이름은  Joao Manuel Bastos.

홈페이지는 www.joaomanuelbastos.com이다. 

그의 작곡 및 연주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성 조르지 성 아래에 위치한

Porta do sol에서의 전경.



역시 월요일이라 휴관이었던,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집. 

박물관으로도 쓰인다던데 
무엇이 전시돼 있을지 조금은 궁금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소로 이동.



그 인근의 리스본 시청 건물.

어찌나 길게 지었는지 

광각 24mm인 LX3의 파노라마 모드로도 다 담을 수 없다.



이제 리스본이 조금은 좋아진 나는, 

셔터를 누르는 것이 즐거워진다.






그리고 저녁을 향해 가는 Rossio는 아름다웠고.




2009. 9. 14. Mon.


앞의 포스트에서 잠깐 내비쳤지만, 

사실 리스본의 사흘째 아침은 좀 심드렁했다.

더구나 리스본이든 포르투든 간에

대부분의 성당과 박물관이 월요일에는 쉬다보니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 지 
계획이 서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포스트로 올리겠지만, 

아예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월요일쯤에는 포르투든 오비두스든, 
아니면 코임브라를 향해서이든

이동을 하는 날로 정하는 게 효율적이다. 


아무튼 그래도,

먼 타국의 아침은 기분좋은 법.

버스 정류장의 아침도 사람들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좀 심드렁하게 말해서 그렇지,

리스본의 골목들은 
아주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유럽 古都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포르투갈 문학의 태두라고 볼 수 있는, 

루이스 드 까몽이스의 이름을 딴 광장. 




그리고 마침내 이런 풍경에 이르러선 

좋아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도

이 뒷골목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리스본의 뒷골목들에 특징적인 게 있다면, 

저 개폐식 볼라드(차량 통제용 말뚝)이다. 

사진에 보이지 않지만 왼편에 인터폰이 있어서

등록된 운전자가 얘기를 하면 볼라드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차가 통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골목마다 설치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엉성한 도시, 라는 얘기를 했던가.

유난히 공사중인 건물이 많을 뿐더러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된 건물도 참으로 많다. 

어찌 보면 그게 이 도시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구경거리가 어디 있는지, 뭘 봐야할지 잘 모르다보니

가장 쉽고 재밌는 구경거리가 바로 트램이다. 

트램을 탄 사람이나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나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




가이드북에는 
사람도 못 지나다닐 정도의 공간을

신기하게도 빠져나간다.... 는 식으로 
조금은 허풍을 쳐 놓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조금씩 양보하면 
여유있게 다니는 수준이다.

(물론 한 두 구간 정도는 아슬아슬한 곳도 없지는 않지만.)



이날은 사실 사진의 양이 많지 않다. 

내부를 들어간 곳은 거의 없는데다,

유적지(관광지?)보다는 골목들에 더 빠져들었기 때문.

아래는 에스트렐라 바실리카( Basilica da Estrela).




역시나 문을 닫아서 외관만 훑어보고

다시 코메르시우 광장 쪽으로 이동한다. 

코메르시우 광장의 개선문.



그리고 아우구스타 거리.




2009. 9. 13. Sun.


여행을 하면 하루가 길다...기 보다는, 

이번 여행은 마음을 비우고

잘 찍지도 못하면서 좋은 사진에 연연하는 대신

‘전형적인 여행 사진’에 전념키로 했기 때문에

사진이 많아서 포스트가 차고 넘친다.

(한 포스트의 적정한 길이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Sé란, Cathedral의 포르투갈 어휘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교좌 성당.

애초에 Cathedral이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Cathedra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가 ‘자리’를 뜻했으며 
초기 바실리카에서 주교가 앉는 자리를 
칭했다는 배경설명도 덧붙인다.


아무튼 Sé는 sede란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그 뜻은 cathedra와 유사하다.[각주:1]

그래서 리스본에도 하나의 Sé만이 존재하며,

포르투에도 Sé는 하나다. 

나머지는 대부분 Igreja 어쩌고 하는 이름이 
붙어있곤 하다.


아무튼 
리스본의 주교좌성당은 1147년 건립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후 고딕양식의 회랑과 
바로크 양식의 제단 등이 추가된

그야말로 살아있는 건축역사의 박물관이랄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면을 찍는데 상당한 애로가 있다. 
거미줄처럼 트램(시가전차)의 
전깃줄들이 얽혀있는 데다,
위 두번째 사진처럼 
오른쪽의 건물이 시야를 방해한다.
어떻게 보면 관광지스럽다기보다, 
그야말로 리스본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는 뜻도 되겠다.




내부는... 
사실 사진을 통해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성당이라면 모름지기 
저 회중석에 앉아 그 울림과, 
빛의 경계와, 
고요한 성스러움을 느껴봐야 한다. 

아래는 유명하다는, 
장미창. 


그리고 밤이 찾아든 성당. 




여기까지가 리스본 첫날(엄밀히 말하면 도착 둘째날)의 
관광지 순례.

사실 모든 여행에서 
첫날은 일종의 탐색전이 아닌가. 
이 도시가 과연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가, 
과연 나와 이 도시는 잘 맞는가 등등.
하지만 도시가 갖는 
첫인상에 너무 연연하지는 말 것.


리베르다지 대로에서 본 마르케스 드 폼발 광장.



지하철인 메트루(Metro), 
아베니다 역.
단순한 형태와 색상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 리스본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뭔가 허술했고 엉성했으며, 
정교하거나 섬세하지 못했다.
아무리 1755년의 대지진으로 
거의 전부 파괴된 후 재건한 도시라고는 해도, 
파리가 보여주는 그 우아함이나 
두브로브니크의 낡지만 고풍스러운 매력에 비교하자면
그랬다는 얘기다. 



거리의 예술가? 
좋다.

트램? 
좋다.

그러나 거리의 예술가는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이고
트램 역시 리스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됐으나 그래서 정겨운 뒷골목들도 
포르투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왜 리스본에 왔을까?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 
상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

하지만 이제 첫날인걸, 
다급해 할 필요는 없어, 
마음을 다잡는다.


아마도 시내 주행용이 아니라 레저용인 듯 싶다. 


어찌 보면 한국과 닮은 구석도 많은 것이, 
시내버스에 붙어있는 이른바 ‘고객헌장’도 그렇다.



  1. Lisbon's cathedral, called the Sé Patriarchal, is the city's oldest church and is one of the largest constructions of Romanesque origin in Portugal. The Portuguese word Sé, meaning cathedral, comes from the word sede meaning bishop's seat. The building stands within the old, densely built quarter on the southern hillside - there is insufficient room available here for the spacious square which would allow the church to appear more striking. <출처: http://www.planetware.com/lisbon/se-patriarchal-p-lisb-se.htm> [본문으로]
2009. 9. 13. Sun.


아줄레주(Azulejo). 

얼핏 생각하면 푸른색을 뜻하는 
Azul과 관련이 있을 것 같고 

또 타일 중에 대다수가 
푸른색 단색으로 이뤄져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지만,

(더군다나 포스트 제목을 선정적으로 뽑기 위해 
나조차도 ‘푸른 바다’ 어쩌고 했지만) 

엄연히 이 단어는 Azul과는 관계가 없는,

아랍으로부터 유래한 단어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인 점령시대 이후 

아랍의 문화는 이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 단어의 유사성으로 인해, 

단어가 수입된 이후 작품 제작에는 
푸른색이 많이 반영됐을 수도 있겠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포르투갈 현지의 설명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포르투갈의 어디서나 
이 타일 조각들을 마주치게 된다. 

건물의 내부장식은 물론이고 외장재로도 사용되며,

옛 건축물 뿐만 아니라 
요즘의 건물에서도 응용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타일 천국’이다. 


그 중에서도 다양한 시대의 아줄레주를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국립 아줄레주 박물관(Muceu Nacional do Azulejo)이다.
‘마드레 데 데우시’ 성당을 개축한 건물이라고.


이렇게 캔버스처럼 장방형으로 제작된 것도 있지만, 
아래 장식물처럼 복도에 노출된 것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근거리에서 보면 조잡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타일들이 모여
하나의 대형 시각 작품이 되는 걸 본다면,
왜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전통예술로 
아줄레주를 꼽는 지 얼핏 이해도 된다.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성당이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의 묘미도 만끽할 수 있다.



아줄레주에 그려진 작품들은 
그 시대가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에 
성화(聖畵)부터 자연주의 화풍의 전원풍경, 
궁정의 풍경을 비롯해 
일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대의 예술가들이 재해석해낸 아줄레주.


특히 아래 작품은 
색채의 단순하지만 미묘한 변화와
형태의 단순함을 통한 
타일의 물성에 대한 강조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마지막은 
리스본 시가를 지도 형태로 구현한 작품.


아줄레주는 이것으로 마무리하지만, 
앞으로 리스본 시내나 특히 포르투(Porto)의 사진에서
줄곧 나올 예정이다. 
그만큼 흔하고 대표적인 예술이기에.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첫날 벨렝지구와 아줄레주 박물관을 
함께 둘러본 건 나의 실수다.
여행의 동선 치고는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다.
(시내 중심가를 기준으로 서로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다.)

이로서 대충 얼떨떨한 상태에서의 리스본 첫날은 
어느새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09. 9. 13. Sun.


벨렝(Belém).

리스본 중심가로부터 서쪽에 위치한다. 

테주(Tejo)강으로 따지자면 하류쪽, 

그러니까 바다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인 

벨렝탑(Torre de Belém)과 발견기념탑은 

테주강의 하류로부터 시작한 포르투갈의 전성기,

대항해시대와 해양제국의 흔적이다. 


그래서일까, 
벨렝 옆에 위치한 지난 포스트
제로니모 수도원 같은 경우도
바스코 다 가마나 ‘엔리케 해양왕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기도 하다. 

발견기념탑은 포르투갈어로 Padrão dos Descombrimentos.

1960년 엔리케 해양왕자의 500주기를 기념해 건립됐다.

높이는 52미터에, 
포르투갈 고유의 뛰어난 범선이었던

캐러벨 선을 모티브로 했다(고 가이드 북에 나와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독재국가가 그렇듯
옛날의 영화를 현재의 권력의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유신시절과 신군부 시절의 건축물과 같이
웅장하고 영웅적인 무언가를 전해주려는 의도.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든
부정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그리고는 4년 뒤 
살라자르 독재체제는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한다. 
어떤 어둠도 
빛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역사를 뒤로 감춘 채, 
이제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어쨌든 살라자르는 살라자르고, 
엔리케는 엔리케니까.



흥미로운 것은 유적을 설명하는 표지판이다. 

2004년 파리에 갔을 때 
아래와 같은 형태의 표지판을 처음 보았다. 

일종의 CI 작업이랄까, 

통일된 형태의 세련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는데, 

포르투갈도 동일한 형태의 디자인을 
활용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을 더 가 봐야겠지만, 

혹시 EU 차원에서 통일된 
디자인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본다. 



그리고 더 하류로 내려가면, 
그 유명하다는 벨렝 탑(Torre de Belém)이 나온다. 
16세기초 마누엘 1세 시절 
배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이 우아한 탑은 기단 부분이 치맛자락 같다고 해서

‘테주강의 귀부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사실은

가이드 북이라면 어디나 나와있고, 

인터넷에서 ‘벨렝탑’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씌어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놓으면, 

딱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님’스러운 사진이 된다. 



탑은 일종의 감시 초소 개념인지라

오르고 내리는 계단이 널찍하지 않다. 

불필요한 사람들이 
오르내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출입을 통제해야 했으므로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1명이면 꽉 찰 계단에 
올라가는 이와 내려오는 이가 뒤엉켜

꼭대기에 오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4월 25일 다리’로, 

살라자르 시대에는 정권홍보 차원에서 
‘살라자르 다리’로 칭했으나

1964년 민주화 이후 민주화 기념일인 
4월 25일을 따 개명했다.



이런 유적지에 빠질 수 없는 요소.

특히 아래 총 들고 있는 사람은, 

기념사진을 촬영하겠다고 하면 

관광객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는 포즈를 취해준다. 

이런 것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그리고 벨렝 지구 공터에서 만난 축구하는 사람들. 

잊기 전에 하는 말인데 

당연히 포르투갈은 ‘축구의 나라’다,

어디나 기념품 가게에 등번호 9번의 
호나우두 티셔츠가 걸려있을 정도로.

그런데 오른쪽의 뒤엉킨 사람들을 보면, 

뭐 동네축구가 다 그렇듯 
그다지 ‘신사적인’ 게임은 아니었던 듯 싶다. 



사실 음식물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탓에 

포르투갈의 다양한 맛있는 먹을 거리를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론리 플래닛에서 추천한, 

벨렝 지구의 제과점에서 먹은 Pasteis de nata의 포장재.

쉽게 말하자면
커스터드 크림이 얹혀진 타르트다.



이 포장재에는 6개가 들어있다. 
사실 포르투갈의 첫날이고 해서
워낙 정신없던 터라
긴 줄에 떠밀려 서두르는 바람에 6개짜리를 샀으나...
2개면 충분하다. 
(달아서 더 못 먹는다.)
그리고 아래는 벨렝 문화 센터에서 본, 
재미있는 화장실 표지.
이런 세부적인 디자인을 보면 
역시 문화적인 전통이 상당한 나라라는 생각.


불행히도 센터의 전경이나, 
센터 내부 전시물은 찍을 생각을 못 했다. 
조금 허기졌고, 
조금 지쳐있었고, 
(위의 타르트를 먹기 전이다)
다음 포스트들에서 말하겠지만
사실 리스본의 첫 인상은, 
좀 ‘엉성한’ 나라라는 생각에 심드렁해졌기 때문.


: 사진을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09. 9. 13. Sun.


일요일은 대부분의 유적지와 박물관이 오후 2시까지 무료다. 

일단 시내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성 제로니모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과 

벨렝 지구를 방문하기로 한다. 

사실 시내는 바이사(Baixa)와 
바이루 알투(Bairro Alto), 알파마(Alfama) 등 
일곱개의 언덕 중심으로 나뉘어진 지역별 명칭도 
아직 눈에 잘 안 들어오는 터라, 

어디부터 찾아가봐야 할 지 몰랐던 탓도 있다. 


가장 멀리 있지만 
그래서 뚝 떨어져 가장 눈에 띄는 두 곳이 
첫 방문지. 

성 제로니모 수도원은 
시가전차 15번을 타고 가면 나온다. 



사실 첫인상은 별 것 없었다. 

건축양식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내게

이런 류의 성당이나 수도원이야 
유럽에 흔하디 흔하다는 느낌.

그저 포르투갈 특유의 후기 고딕 양식인 
마누엘린 스타일의 건물이라는 게, 

내가 이 수도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 




이 수도원은 회랑과 성당 내부가 별개의 입구로 되어 있는데

(사실 성당은 산타 마리아 성당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회랑은 언제든 관람이 가능하지만, 

성당 내부는 미사와 미사 사이의
여유 시간에만 입장이 가능하다. 

— 적어도 내가 찾은 일요일은 그랬다.

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시도때도 없이 미사를 드리는, 

종교적인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평일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먼저 ‘구경’한 곳은 회랑. 






사실 크게 보자면 잘 구별이 안 되는 건물일지라도, 

세부의 장식을 보면 흥미로운 특징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성 제로니모 수도원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회랑의 기둥들이 이뤄내는,
 아래 이어지는 사진들과 같은 기하학적 패턴이었다. 








관광객들이 참 많았으나 

그다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다들 여유로운 표정, 

성당이라 더 그랬겠지만,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사람을 그리 만드는 지도 모른다.




포르투갈 근현대 문학의 거목이라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유해도 이 수도원에 안장돼 있다. 

원래 다른 곳에 묻혔으나, 
우리 말로 하자면 ‘이장(移葬)’해 온 것.



아울러 ‘제로니모’가 누굴까 했더니만, 

서양미술사 책을 몇 번 들여다본 이라면 익숙할

‘성 제롬’이 바로 그였다. 

아래 그림에서도 보이듯, 

사자가 늘 그의 책상에 붙어 있어 
유난히 기억하기 쉬웠던 성인.

그러나 크리스트 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막상 성 제롬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내 한계.



회랑을 장식하고 있는 

포르투갈 전통의 아줄레주(Azulejo) 장식. 

원래는 푸른색 단색이 유명한 타일 장식이지만, 

이 아줄레주는 다채색으로 채색돼 있었다. 



마침내 성당 앞에 섰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앞서 얘기했듯이 관람 시간이 

미사와 미사 사이의 여유시간으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 



그리고 성당 내부.



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마누엘 양식이 고딕 양식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궁륭의 뼈대들이 수놓은 기하학적 아름다움.



성당에 빠질 수 없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

생각해보면 스테인드 글라스란, 

물리적 깊이는 결여됐으나 
영적 깊이로 인해 신비로워 보이는, 

그리고 밖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검은색의 무(無)로 보이나

성당 내부로 들어와야 
비로소 형상을 얻게되는 예술이 아닌가.

성당 밖에서 당신은 어떤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지만

(다시 말해 신의 밖에서 당신은 어떤 경이로움도 알 수 없지만),

성당 안에서야 비로소 
당신은 美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얻게 된다.  



고딕 양식은 어쩌면 
신플라톤주의적인 빛에 대한 오마주 아니었을까.

이처럼 빛을 신비롭게 받아들이는 건축물은, 

그 전에도 후에도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헤매다보면, 

어느새 출구에 이른다. 

아마도 기도를 끝낸 사람들에게는, 

이제 저 밖의 환한 빛도 신의 자취로 느껴질 것이다.



이제 발견기념탑과 벨렝탑으로 이동.


2009. 9. 12. Sat.

아침 10시 20분 인천발. 

헬싱키 경유, 리스본 행.


핀에어는 처음 타본다. 

느닷없이 음악을 듣다가 떠나고 싶어진 포르투갈인지라 

미리 항공권을 예매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기껏 2~3주 남겨놓은 터라 
다른 항공편을 선택할 수도 없었던 것.

그러나 가장 항로가 짧은 덕에 비행시간 역시 짧았고,

그 때문인지 요금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지라 
핀에어를 이용하기로 했다. 

단, 마일리지가 쌓이지 않는 것이 단점이지만.

 


핀에어의 차분한 톤의, 깔끔한 좌석. 
이처럼 옷걸이가 있던 좌석이 
다른 항공기에도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경유지인 헬싱키 공항에서. 
공항 저편으로 넓게 펼쳐진 숲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푸르던 하늘에, 
금세 바람이 비를 몰고 온다.


사실 이제는 창가쪽 자리보다 
복도쪽 자리가 더 좋지만, 
그래도 떠나는 길에는 
여전히 창가쪽 자리가 설렌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풍경은, 
그것이 비록 구름 뿐인 풍경일지라도 설레기 때문. 


(경유지에서 대기시간을 빼고서도)
자그만치 15시간 가까이의 비행 끝에 도착한 
리스본의 밤. 
숙소인 Hotel Nacional이 위치한 
‘마르케스 드 폼발(Marquês de Pombal) 광장’과 
‘호시우(Rossio) 광장’을 잇는 
Av. da Liberdade 거리의 해진뒤 풍경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도입한 곳이 몇 군데 있더라만, 
포르투갈 시내버스는 이렇게 
노선의 대기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 시스템이 각 정류장마다 설치돼 있다. 


다시 리베르다지 거리.
잠깐의 저녁 산책 뒤 여장을 풀고, 
이튿날을 준비한다. 


알고보니 포르투갈은 파두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더이상 파두를 듣지 않는다. 

파두 클럽에는 노신사와 숙녀, 

그리고 역시나 나이 지긋한 여행객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파두의 나라였기 때문에, 

그 사우다지(saudade)를 느껴보고 싶어 
떠났던 여행이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의 젊은이들은 
훨씬 더 다양한 전통들을 흡수해

새로운 음악들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일렉트로니카와 아프리카 뮤직, 

그리고 파두의 전통과 집시 음악, 

이웃 나라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영미권의 팝음악까지 흡수하면서 

훨씬 더 생기있는 음악을 거리 곳곳에서, 

그리고 그들만의 클럽에서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나 
크리스티나 브랑쿠보다

마드레데우쉬와 둘세 폰테쉬가 
아마 포르투갈 음악의 현재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파두와 사우다지는 
이제 더이상 삶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

그저 포르투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실제적인 힘을 갖는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포르투갈 사람들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 

이른바 ‘대항해 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된 먼 곳으로의 동경과

이제는 옛 영화가 되어버린 그 시대에 대한 

쓸쓸하지만 도도한 향수가 어우러진, 

도시의 건물과 그 옆을 흐르는 강물, 

바람과 바다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그들만의 향기라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추측도 가능할테다. 

이제는 전설이 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그들이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섞여 있다. 

살라자르의 장기독재 정권이 파두를 후원하면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일종의 '문화대사' 역할을 했던 것. 

어쩌면 파두를 떠올릴 때 
그런 씻고 싶은 과거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제 파두는 흘러간 옛노래, 

우리로 말하자면 ‘가요무대’에 나올 법한 

유성기 시대의 트로트라고나 해야 할까, 

생생한 현재를 보여주는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리스본에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에

그렇게 바래져가는 무엇과도 같다. 


그렇기에 파두는 어쩌면 그 자체로 
‘사우다지’의 대상이 되는 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이제 다시 손을 댄다면 
한 줌 가루로 바스라질 듯한 음악. 

‘사우다지’를 노래했으나 
이제는 그 자신마저도 

추억과 향수의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 

그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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