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18. Fri.


포르투는 여러 모로, 

포르투갈의 문화 수도이다. 

특히 이 건물, 

까사 다 무지카(Casa da Musica)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뭔가 다각면체이지만 반듯한 것이 아니라

리듬감 있게 불균형한 덩어리,

마치 현대음악에서의 ‘클러스터’와도 같은 이 건물은,

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작품이다. 




혹자는 이 건물을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비교하기도 할만큼, 

건축계에서는 나름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건물의 모양새가 달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수용자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보아도 될까.


이 음악홀이 단지 
고답적인 음악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할 때만 비로소 
그 모양이 완성된다는 의미일는지도 모르겠다.




포르투의 역사지구로부터 북서쪽, 

보아 비스타(Boa Vista) 대로의 시작점에 위치한 이곳은

3개의 오케스트라 – 또는 앙상블 — 를 갖고 있다. 

포르투 국립 오케스트라(Orquestra Nacional do Porto),

고음악 전문인 Orquestra Barroca, 
현대음악 앙상블인 Remix Ensemble이 그것.





아래 보이는 바닥에 깔린 타일은, 

약간 폭신한 소재로 언덕을 이루고 있는데

마치 포르투의 특산물인 코르크를 상기시키는 듯.



출입구 역시 독특해서, 

아래 합성수지 소재의 커튼이 

자동문 처럼 열리고 닫히는 구조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건물의 다각형 실루엣이 건축물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건축물 자체에 대한 가이드 투어가 있을 정도.

홀의 음향도 궁금했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포르투에 있는 동안에는

공연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에서 이뤄지는 공연이

단지 클래식 음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재즈와 팝, 심지어 클러빙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




다양한 기념품들.
바라보고 있으면... 사게 된다.
기념품들도 상당히 예뻐서 구매욕을 자극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한다면
까사 다 무지카 측이 자체제작한 CD들일 것이다.
이곳 이외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또는 포르투갈 내에서도 이곳 아닌 어느 도시에서도
구할 수 없는 CD들이기 때문이다.





까사 다 무지카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뻗어있는 대로가 바로 
보아 비스타 대로(Avenida da Boa Vista).
사실 까사 다 무지카가 위치한 곳이
보아 비스타 로터리다.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선 신시가지.



신시가지, 라고는 하지만
이런 장면들도 눈에 띄고.






관광지로서의 포르투갈이라기보다는
포르투갈인들의 거주지로서의 포르투갈의 모습이랄까.



그리고 돌고돌아,
내 발길은 포르투의 가장 큰 전통시장인
발랴웅 시장(Mercado do Balhão)으로 향한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재래시장을 들러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관광객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꾸며진 모습이라기 보다
현지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운이 좋다면 마음에 드는 사진들도 
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아쉽게도,
다음 포스트는 포르투의 마지막 밤이다.
9월 20일 아침 비행기이므로,
이튿날인 19일에는 다시 리스본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


2009. 9. 18. Fri.


리스본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나가려면 

거진 시간 반을 달려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느낌과 비슷. 

하지만 포르투는 도우루 강을 따라

시가전차를 타고 20분쯤 이동하면

드넓은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 

생각보다 바다가 멀지 않다. 


그래서 포르투 3일째 아침, 

대서양을 향해 길을 떠난다. 

(사실 ‘대서양’이라기보다는 ‘대서양이 보이는 바닷가’가 
더 적합한 표현이겠지만.)


호텔을 나서 전차 정류장으로 가는 길, 포르투의 아침 표정.







전날 보았던 엔리케 해양왕자의 동상, 

그 머리 위에는 갈매기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동화 “행복한 왕자”가 생각나는 풍경.




전차 안 풍경은 리스본의 그것과 별 다를 것 없었으나, 

꽤 오래된 듯 실내조명이 매우 고풍스러웠다. 





전차를 타고 가며, 

도우루 강변의 삶을 엿보다. 






포르투갈의 작별 인사는 아데우시(Adeus).

이 말을 풀어보자면 일종의 전치사인 a와,

신을 의미하는 deus가 합쳐진 말이다. 

(스페인 인사말 adios와 기원이 같다.)


굳이 우리 말로 표현하자면, 

‘신과 함께하시길’ 정도가 되겠다. 

그런 본 뜻보다는 그저 ‘안녕히’ 정도의 인사말로 정착했지만.


아무튼 
누군가는 배를 저어 떠나고, 

누군가는 또 그를 위해 기도를 해줄 것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며, 
먼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길 떠나는 자여, 
신이 당신과 함께 하시길. 



유럽의 소형차 사랑은 어디나 비슷하다. 

자동차를 위한 길이 좁고 
(반대로 사람을 위한 길은 넓다)
주차공간이 부족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사람들이 좀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것.





푸른 바다와 쪽빛 하늘이 점점 가까와지니, 

마음은 날아갈 듯 부풀어오른다. 







도우루 강 하구.

물막이 둑이 긴 호(弧)를 그리며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등대. 

길 떠나는 자에게 기도가 하나의 위안이 되듯, 

집으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등대가 

커다란 위안이 된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은 

대체로 영양분이 풍부하다던가. 

고기잡이, 라기보다는 낚시를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바다는 이들에게 숙명이요, 도전이자, 
삶 그 자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해질 때도 있기 마련이고,

바다에 익숙한 이들은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포르투 도심으로 돌아오는 길, 

헬리콥터 투어를 제공하는 회사가 눈에 띈다. 

가족과 함께 간 것이라면 한번쯤 이용할 만 하겠다. 

혼자 가기에는 좀 민망하기도 하고, 
부담도 되지만.



이번 포스트는 이렇게, 

날로 먹으면서 끝.

다음은 포르투의 명물 중 하나인

음악의 전당(Casa da Musica)로 이동한다.


2009. 9. 17. Thu.


리스본에 테주 강이 있고 파리에 센 강이 있다면

포르투에는 도우루(Douro) 강이 있다. 

오래된 도시는 늘 강을 끼고 있는 법이다. 

한강에 비하자면 그리 넓지 않은 강이지만, 

사실 도시와 유기적으로 어울리기에는

한강이 비정상적으로 큰 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서울의 ‘배산임수’는 인왕산과 청계천이었다.)


어쨌든 이 강은 포르투라는 도시가 

이 나라의 다른 지역과,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이자 
문화를 주고받는 소통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 도우루(사실 포르투갈 발음은 도-루에 가깝다고 한다) 강 위에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이 바로 이 다리, 

동 루이스 1세 다리(Ponte de Dom Luíz I)이다.


리스본의 유명한 “산타 주스타의 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이 다리 역시 에펠의 또다른 제자인 테오필 세리크가 디자인했다. 

포르투와 남쪽의 빌라 노바 데 가이아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당시 신소재로 각광받던 
철골의 단순명료한 모더니즘을 이용해

복층 구조로 설계됐다. 
하부의 데크는 자동차가, 

상부의 데크는 전철이 다니게끔 돼 있는데,

특히 사람들이 건너 다닐 수 있도록 
상부의 데크는 늘 개방돼 있다. 

높이가 44미터이니, 나처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건널 때 조금(과연?) 다리가 떨릴 수 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언덕 위 건물이

모로의 정원(Jardim do Morro). 



다리 위에서 바라본 포르투의 풍경. 




흑백으로 변환하면 더 멋질까 하여 후보정한 결과물은 아래에. 




다리를 건너다보면 옆으로 전철이 지나다니는데, 

워낙 천천히 달리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전철이 다니지 않는 동안에는 다리 전체가 보행자 차지. 

그러니까 아래 사진에 보이는 
전철의 레일을 가로지를 수 있다는 얘기인데, 
덕분에 다리 왼쪽과 오른쪽 전경을 왔다갔다 하며 즐길 수 있다. 



포르투의 남쪽인 빌라 노바 데 가이아(Vila Nova de Gaia)는
그 유명한 포트 와인의 저장창고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그리고 대개는 주교좌성당 Sé 앞에서 
포트 와인 관광 기차(모양의 버스)가 출발한다. 
나는 비록 포트 와인 관광은 하지 않았지만, 
와인에 관심이 많다면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모로의 정원(Jardin do Morro)은 추측컨대 
무어인의 정원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모로의 정원은 포르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포르투의 풍경을 즐기려면, 한번쯤 가봐야 할 곳.



이쯤 되면 당연히, 
아, 이곳에서 야경을 보면 정말 멋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 
그래서 저녁때 다시 찾기로 결정하고 
일단 포르투갈 사진센터(Centro Português de Fotografia)로 이동한다.


옛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내부의 구조물들을 최소한으로 개축해, 
미술관 같지 않은 독특한 내부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대충 의역하자면)
“프랑스 사진가들의 눈으로 본 포르투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어느 사진가는 
포르투갈의 도시에 빛나고 있던 “TEXAS”라는 간판을 찍었고, 
멀리 동아시아의 이방에서 온 나는 
그 사진을 다시 카메라에 담는, 
이 아이러니함!


국립 사진 센터 맞은 편으로는 
코르도아리아 광장(Plaça da Cordoaria)이 위치해 있고, 
때마침 주민들이 모여 작은 벼룩시장을 열고 
자신들만의 ‘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이 유럽의 도시를 정겹게 만든다. 


중세의 삶과 현대의 삶이 같이 녹아들고 있는 도시, 
포르투.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도심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길을 잃고 만난 풍경들. 


약간 술기운이 오른
두 남자가 나를 향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흔쾌히 찍어줬다기보다는 약간 겁을 먹고 셔터를 눌러서
사진은 이 모양 이 따위이지만, 
나름 소중한 포르투갈에서의 추억 가운데 하나다.


해는 지고, 나는 다시 루이스 1세 다리로 향한다. 
포르투의 야경을 상상하며.


유럽의 대중교통이 자율적이라는 점은
파리에서도, 두브로브니크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포르투의 시스템은 정말 심할 정도다. 
달랑 리더기 2개.
표를 리딩하지 않는다고 해서 벨이 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리딩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드물다. 
부럽다.





시 모로의 정원(Jardim do Morro).



포르투의 밤은 역시 예상대로
가슴을 떨리게 하고.




밤에 건너는 다리는 또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포르투의 성곽과 모노레일(funicular)의 고즈넉한 밤풍경.



늘 전철과 보행자가 다니는 다리다보니
안전점검과 보수는 주로 밤에 이뤄지는 모양.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그 흘러가는 시간을 여행자는 아쉬워하고. 




밤에 찾은 성 벤투(São Bento) 역.



당신이 만약 포르투갈에 간다면, 
리스본을 가지 않더라도 포르투는 반드시 가야만 한다. 
도시의 모든 것이 당신에게 말을 거는 곳, 
햇살과 바람만으로도 눈이 부신 도시, 
포르투.



2009. 9. 17. Thu.


사실 포르투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엇 하나를 꼬집어
얘기할 거리가 없는 것. 

그냥 그 도시 자체로 좋은데, 

굳이 생각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리스본과 신트라에 대한 포스트는

뭔지 모를 이물감이 느껴져서 

도대체 내가 이 도시에 온 목적이 뭐였지, 

자꾸 고민하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만 많아지기도 했다.)


아무튼 이번 포스트가 다룰 곳은

본격적인 역사지구(Ribeiro)다.

이전 포스트가 

상 벤투 역에서 바라본 Rua das Flores로 끝났으니 

당연히 이 포스트는 플로레스 거리로 시작한다. 



1521년 처음으로 생겨난 거리. 

특히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지가 

당시로서는 호화주택이었던 건물들을 지으며 번성했다. 

유명한 건물들은 많지만, 

모두 개인 소유라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듯.

그 중에 포르투 안내 지도에도 나오는 

미제리코르디아 교회(Igreja da Misericórdia)는 공사중.


하기는 수백년씩 묵은 건물들이

그냥 내버려둬도 멀쩡할 리는 없지 않은가.

(2004년 파리에서도 노트르 담 대성당이 공사중이었었다.)



이 거리는 표정이 있어서 좋다. 
포르투라는 도시는 개성으로 넘쳐나는 도시, 
여행에서 길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키스 해링의 작품을 ‘표절’한 듯한 어느 건물 창문.



그리고 플로레스 거리를 지나오면 광장이 나온다. 
엔리케 해양왕자의 동상(Estatua Infante D. Henrique)이 있는 
이 광장의 남쪽에서, 
서쪽의 도우루 강 하구로 가는 시가 전차가 출발한다. 
도우루 강 하구, 
다시 말해 ‘대서양’으로 향하는 일정은
나중에 다시 포스트를 올린다. 


시가전차 1번 정류장 맞은편에 위치한
성 니콜라우 교회(Igreja de S. Nicolau).



그리고 동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엔리케 해양왕자가 살았다고 알려진
생가(Casa do Infante)가 있는 골목이 나온다. 


1354년 처음 한 동의 타워형 건물로 시작해, 
여러 세기에 걸쳐 개축과 증축을 거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귀결됐다. 
다른 건물들과 나름 사이좋게 어울려 있어 
외관은 그다지 눈에 띄는 건물이 아니지만,
내부에는 이 집과 포르투가 발전해온 역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마련돼 있다. 

한때 세관으로도 쓰였던 만큼, 
당시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일종의 ‘주판’도 함께 전시돼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상징이기도 한, 
수탉의 장식물이 건물을 나서는 나를 반기고.


도우루(Douro) 강은 적당히 깊고, 적당히 넓다. 
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정겹다. 




사실 포르투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도우루 강이다. 
그 유명한 포트 와인을 실은 배가 
이동하던 뱃길이기도 하고, 
바다로 향하는 이들이 설렘으로 항구를 떠나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강을 따라 걷는 것, 
어쩌면 포르투의 심장을 느끼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다리가 바로 포르투의 명물인 
루이스 1세 다리(Ponte Luiz I).
복층의 구조물로 위는 전철이, 
아래는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다. 
특히 윗부분은 도보로도 건널 수 있게 돼 있어, 
포르투의 전망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루이스 1세 다리와 포르투의 멋진 풍경은, 
일단 다음 포스트로 미룬다. 


포트 와인을 나르던 배를 재현한 듯한 배.



이런 도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갈매기.


그리고 Ponte Luiz I 맞은 편에서는, 
포르투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일종의 모노레일을 탈 수 있다. 





그리고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면
포르투의 주교좌성당(Sé)이 코앞이다.







1110년경 지어지기 시작해 13세기 완공된, 
포르투에서 가장 오랜 건축물 중 하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후에 증.개축 과정에서 고딕 양식도 보태졌다(고 한다).
빛이 스며들어 구석구석으로 퍼지던, 
성당 내부도 인상적.









꽤 높은 언덕에 위치한 터라, 
성당 주변에서 바라보는 포르투의 전경도 볼 만 했다.



그리고 Sé 주변을 에두르는 골목길에도 
게라 준케이루의 집(Casa Museu Guerra Junqueiro)과 같은 
문화유산이 있었으나, 


그다지 대중적인 관광지는 아니었던 듯, 
골목은 한산했고 고양이 한 마리만 졸고 있었다. 



2009. 9. 17. Thu.


사실 누구나 해외에 나가면 고민을 하게 마련이다. 

일정이 조금 빠듯해도 여러 곳을 보고 올 것인가, 

아니면 한 곳을 자세히 보고 오는 것이 나을 것인가.


자세히 본다고 해도 어차피 1주일 정도로는 

하나의 도시조차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자를 선택하는 편에 속한다.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향할 때만 해도 

만약 포르투가 마음에 쏙 들면 사흘, 

아니라면 이틀만 있고 
대학도시인 코임브라(Coimbra)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포스트(포르투갈의 시원을 찾아서)에서 보듯 
첫눈에 반했기 때문에, 

결국 주저 앉는 것을 선택. 

이 도시라면 한달이라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본격적인 포르투 관광의 시작은, 
클레리구스 성당(Igreja dos Clérigos)이다. 
이 성당의 종탑이 76미터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아서,
포르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게 
첫번째 이유. 

그리고 두번째 이유이자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론리 플래닛에서 추천한 
walking tour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탑 꼭대기에서의 전망은 듣던대로 훌륭했고,
나름 원래 계획은 전망을 돌아가면서 찍고 
360˚ 파노라마를 만들까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중의 몇 컷만 올린다.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내부도 볼 만 했다.
아침 나절의 고요함, 
크리스찬과는 거리가 먼 나도 
절로 기도가 나올 법한 곳.
 



기도서, 그리고 성가집. 
Christe eleison, kyrie eleison...
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론래 플래닛의 추천코스는 클레리구스로 시작해 
상 벤투 역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역사지구(히베이루; Ribeiro)로 이어진다. 

클레리구스 성당은 어떤 면에서는 
포르투의 역사지구인 히베이루(Ribeiro)의 
또다른 한 축이다. 
히베이루를 직사각형으로 본다면, 
클레리구스 성당과 상 벤투 역을 잇는 선이
윗변이라고 보면 된다. 



상 벤투 역(Estação de São Bento)으로 가기 전, 
리베르다드 광장에 위치한 
콩그레가도시 성당(Igreja dos Congregados).

이미 한번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의 신앙심은 매우 깊어서
평일에도 늘상 기도하러, 
미사를 보러 성당에 드나든다. 
(물론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기는 하지만.)



상 벤투 역은 20세기에 
옛 수도원 자리에 건설됐다. 
이 역은 포르투갈 북부 열차 교통의 중심지다. 
리스본 행 열차는 이 역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음 역에서 연결편으로 갈아타야 한다. 

상 벤투 역에서 동남쪽으로는 주교좌 성당인  Sé가 있고,
아래 사진의 골목길은 중세시대 건물이 태반인, 
유명한 Rua das Flores로 이어진다. 



하지만 도대체 사진을 어떻게 찍었기에
아쉽게도 상 벤투 역의 전경 사진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내부를 수놓은 아줄레주 사진들만 몇 장 올린다. 
주로 포르투에 얽힌 역사적 사건들을 새겨 넣었다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내게, 
저 그림들을 일일히 분석하고 감상하는 건 
당연히 벅찬 일이다. 

다만 아줄레주가 꼭 성화(聖畵)나 
역사화 스타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시대의 유행을 타며 변화했다는 것은 
알 수 있겠다. 





이제 상 벤투 역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역사지구 ‘관광’을 떠난다. 
사실 이번 포스트는 뭔가 아쉬운
맛보기용 포스트고,
다음 편에야 고풍스런 도시 포르투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린왕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의 별로, 장미가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 걸까?

센 강변의 어느 계단 아래
저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라도 어린왕자가 이 지구 위에 '유배'된 채 어딘가에서, 
그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어린왕자는, 
'관계'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유년시절'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정희성 시인은
고향은 "공간 속에 있지 않고 /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고 했다.
고향은 그런 것이다. 
단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유년시절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축적된 채로
어쩌면 먼 과거의 추억 속에서나 저장돼 있을 그런 곳.
오랜 세월을 돌아 마주하게 된다면,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너무나 달라져 
어색하고 낯설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지용 시인도 오래 전,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는 구절을 썼을 것이다.

누구나 가끔은, 두고온 장미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사무치게 보고싶은 무엇이 있는 법이다. 
비록 바오밥 나무와 3개의 화산이 골치를 썩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때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넋을 놓은 채, 
망연히 지평선을 바라보아도 좋으리라.
그리고 당신이 언젠가
사진 속의 남자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이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부탁해 봐도 좋으리라.

"양 한 마리만 그려주지 않을래요?"
2009. 9. 16. Wed.


포르투. 

포르투갈의 북부에 위치한, 

리스본에서 기차로 약 3시간 반 정도 떨어진 이 도시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포르투(Porto)는 항구(port) 도시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은 
Portus Cale. 

고대 마을이자 항구였던 이 곳은

지금의 포르투의 한 부분이 된다. 

기원이 오랜만큼 고풍스러운 매력과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포르투갈인의 생동감이 
잘 조화된 도시.


그러나 고속버스에서 내린 순간 
싸늘하게 불어오는 찬 바람, 

그리고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숙소를 구하려 좀 돌아다니고 나자

포르투에서 드디어 국제미아가 되는가 싶어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9월이면 성수기도 아닌데 숙소가 없으랴.

첫 호텔에서 그 근방 호텔이 전부 예약돼 있다고 들었으나
다행히 포르투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알리아도시(Aliados) 거리, 아르누보 스타일의 멋진 건물에 
숙소를 정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5층에 있는 더블룸. 

말이 5층이지(그리고 포르투갈의 5층은 우리나라 6층이다), 

사실은 다락방(attic)이었다. 

그래서 사진에 보이듯 창문도 좀 높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나중에 공사해 붙인 듯

(하기는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에 
방마다 화장실이 있을리가...)

전반적으로 편의시설은 시원치 않았으나,

이 포스트 마지막 쯤에 외관을 다시 보겠지만 

정말 멋들어진 고풍스런 건물에

숙소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이지 않나 말이다. 




당연히 엘리베이터 역시 나중에 지어진 것이라, 

좀 신기한(?) 시스템이다. 

안쪽에 엘리베이터가 다니고, 

겉에 철로 만들어진 덧문이 있는 형태. 

마치 수동으로 문을 여는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처럼, 

이거 은근히 재미있는데다, 더 안전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각설하고, 

이제부터는 포르투라는 도시에 대한 약간의 곁눈질이랄까.

그렇게 서서히 도시와 친해지는 것도 
나름대로 멋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위 사진에 보이는 것이 산타 카타리나 거리. 

우리나라 서울로 치면 명동 거리라고 할 만큼 

옷 가게도 많고 트렌드에 민감한 곳이구나, 싶다. 


그 거리에서 만난 자그마한 교회는

온통 아줄레주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다.

뒤에 알게 됐지만, 

포르투에 이런 건물이 내가 본 것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을 정도.




포르투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릴 때 불었던 찬바람은, 

결국 산타 카타리나 거리에 비를 뿌린다. 

금세 우산을 챙겨들고 나와 파는 여인.

(이래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건가 보다.)




Ultimos Dias.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땡처리 마지막날, 정도일까?

이것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 랄 수 있지만,

유독 포르투갈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유유자적, 

오래된 도시의 핏줄들을 따라 걷는 재미란!






그리고 바탈랴(Batalha) 광장의 

Igreja de Santo Ildefonso.

처음 포르투에 도착한 것이 이 광장 옆의

고속버스 터미널이었으니까, 

돌고 돌다 결국 제자리로 온 셈이다.





그리고 바탈랴 광장의 다양한 표정들, 군상들.




이윽고 다시 발길은 알리아도시 거리로 향한다. 

저 하얗게 빛나는 건물 오른쪽으로 

성 벤투(Bento) 역이 위치해 있다. 


이 저물녘의 황금빛 햇살에 금방 포르투에 반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설레는 따스한 햇빛!





햇빛과, 
바람과, 
파란 하늘과, 
저 구름을 보고 나면,


이 도시를 도저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숙소. 

알리아도시 펜션(Pensão dos Aliados). 

알고보니 론리 플래닛에도 추천해 놓은 곳이었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정말 멋진 곳이다. 


더구나 비수기에는 숙박비가 대폭 인하돼,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더블룸이 50 유로 정도였으니 

요즘처럼 유로 환율이 천정부지인 시기에

포르투갈은 정말 여행하기 매력적인 나라.

저녁과 휴식, 그리고 다음날을 위한 준비.







2009. 9. 15. Tue.


사실 포르투갈로 떠나면서 머리 속에 떠올렸던 곳은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호까 곶(Cabo da Roca)이다. 


가이드 북에서는 대체로 로카 곶, 이라고 쓰지만

아시다시피 (호나우두; Ronald 에서 보듯) 
단어의 첫 머리 R은 

프랑스어의 R 발음처럼 ‘ㅎ’에 가까운 발음이 된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 바위 곶(Cabo da Roca의 뜻이 바로 ‘바위 곶’이다)은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륙의 끝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굳이 표현하자면,

‘from far east to far west’ 정도가 되겠다.

나름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카톨릭의 전통이 생생히 살아있는 나라 답게

십자가가 대서양을 마주보고 있는 
호까 곶의 정확한 위치는,

북위 37도 47분, 동경 9도 30분.

기념비에는 서사시인 카몽이스의,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호까 곶에 도착해서야

아, 내가 그리던 포르투갈이 이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꿈꿨던 여행이 호까 곶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




혹시 해남 땅끝 마을에 가보셨는지?

우리의 땅끝 마을은 

상당히 다정다감하다는 느낌이 든다. 
육지의 끝이기는 하지만

곧이어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어

육지와 바다가 첨예하게 맞닿은 곳이라기보다

사이좋게 이어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이곳 호까 곶은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다.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망망한 바다.

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짓눌려 키가 크지 못한 풀잎들. 

실제로 바람이 워낙 강하다보니 
몸무게가 가벼운 편인 나로서는

종종 발걸음이 어지러워질 정도.



어쩌면 포르투갈인들에게, 

저 먼 수평선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편치만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던 에스파냐로 인해 

지중해 뱃길은 막혀 있었고, 

한반도 크기만한 영토 역시 
그다지 비옥하지 않은 탓에

바다로 나서는 것은 
이들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대양 항해가 수월한 범선의 개발과 ‘캐러벨 선’, 

그리고 이어지는 ‘대항해 시대’의 역사는

괜히 포르투갈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많은 곳을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서해안과 같은 해안은 정말 보기 드물다는 것.

대부분의 해안은 대륙이동설을 증명하듯 

이렇게 잘리듯 절벽과 바위로 이뤄진 곳이 많다. 

(하기는 우리나라 동해안도 마찬가지겠다.)


그러니 빙하기에는 육지였을 서해바다가, 

그래서 이 드넓은 갯벌과 그곳에서 사는 동식물의 생태계가

세계적으로 환경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엄청난 자원을 방조제니 기름 유출이니 
말아먹고 있는 게 우리, 인간이다.)



이제는 실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호까곶을 편하게 즐기려면

여름에도 긴팔이 필요하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그 끝 대서양 한복판으로부터 부는 바람이다. 

바람을 무시하지 말 것.


대개는 신트라에서 순환 버스를 타거나 

신트라 역 앞에서 Sctturb 버스를 탄다. 

정류장에도 대충 시간표가 적혀 있지만 

호까 곶 안내소에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 

시간표가 어긋나는 경우도 많다. 


리스본으로 돌아오려면, 

신트라를 경유해도 되지만 

카스카이시(Cascais)를 경유해도 된다. 

막차 시간이 가까와 온다면

신트라든 카스카이시든 아무 곳으로나 출발하는 게 낫다. 

9월의 저녁에 한시간 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으면

얼어 죽을 것 같이 느껴진다. 


이만하면 가이드 북에 나오지 않는 실용적인 정보는

대충 적어놓은 것 같고, 

이날 밤.



드디어 사흘간 미뤄오던 파두 클럽에 갔다. 

론리 플래닛에서도 추천하고, 

미슐랭 가이드에서도 추천하는 나름 관광명소.



바다가 포르투갈의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얘기했던가?

그 운명, ‘fatum’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파두(Fado)다.



제일 왼쪽의 콧수염 난 남자가 유명한 ‘기타라’ 연주자인데, 

기타라는 포르투갈에 내려오는 기타의 한 종류다.

이곳에서는 자체제작한 CD도 판매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파두 가수 Mariza도 
이곳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물론 CD에서도 두 개의 트랙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부분 공연은 밤 11시부터 시작한다. 

파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클럽 라이브가 그렇다. 



......하지만,

파두는 사실 이미 죽은 음악이었다. 

아니, 죽었다기보다는 파두가 노래하는 사우다지(Saudade), 

그 사우다지의 대상 자체가 되어버렸다고 할까. 

내가 간 날도 관객은 반도 차지 않았으며, 

관객 대부분은 50~60대 이상이었다.

(관련 내용은 앞선 포스트,  “포르투갈은 파두의 나라가 아니다 참고.)


아래 보이는 곳이 위 포스트에 언급된 클럽인데 

정말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음악은

아프리카 리듬이 많이 섞인, 세련된 음악.



솔직히 친구라도 한 명 있었다면 

저 클럽에 들어가 보았겠지만, 

비쩍 마른 동양 남자 한 명이 혈혈단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건, 

소심한 나로서는 꿈꾸기 힘든 무엇.


그렇게 나름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호텔로 귀환하다. 

포르투로 떠나기 전 마지막 리스본의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2005. 9. 15. Tue.


신트라 궁을 다룬 

변죽만 울리고 말았던 혼성모방과 키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페나 궁전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궁전은 내부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이나 글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 해도 이미 외관상 충분히 
패러디와 페스티시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무리는 없으리라고 본다. 



도대체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 모양새를

어떤 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바실리카에서부터 고딕과 로마네스크, 
바로크와 아랍, 인도, 중국 등 또다른 문화권에서 흡수된

온갖 양식들이 혼합돼 흥미진진한, 

어떤 면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이 

바로 페나 궁전이 되겠다.





사실 리스본에서의 불편한 감각들, 

엉성하다는 느낌들의 실체를 알게 된 건

신트라에 도착해서이고 

특히 페나 궁전을 보고 나서다. 


생각해보라. 

1755년의 대지진으로 리스본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마르케스 데 폼발 남작의 지휘로 재건하기에 이르렀을 때,

남작이든 당시의 정부든 혹은 시민이든

그 목표는 그저 빈 터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전의 유구한 역사, 

그리고 정복과 해양제국의 역사를 추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수입되었던 모든 건축 양식을 동원해서 

복원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온갖 양식들이 
자연스레 세월과 함께 섞여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덜 익숙한 방식으로 
혼합되었을 법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든 양식들의 본질은 
(대지진으로 인해) 사라진 마당에, 

그 형체만을 다시 재건하는 것, 

본질과 다른 외양을 외삽(外揷)하는 것이
‘키치’에 대한 하나의 정의라면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거대한 키치의 도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영토, 

그리고 그 영토와의 교류에서 얻어진 
다양한 문화들을 흡수하는 것.

그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화권들을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위로 만들게 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양식들이 
프랑스 파리처럼 세련된 방식이 아니라,

페나 궁전의 방식처럼 묘하게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결합된 것을 본다면,

보르헤스와 마르케스, 사라마구 등이 보여준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환상문학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두터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쓰는 당사자조차 채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페나 궁전을 들여다 보자. 

정말 예쁜 곳이다. 





예쁜 곳인 만큼 기괴한 곳이기도 하고.




한편의 영화라도 찍으라면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나리오 한편이 저절로 써내려가 질 것 같은 곳.




(아래 사진에 내부로 진입하는 출입구가 보이기 때문에)

다시 혼성모방과 키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내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랍의 방’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사진촬영 금지구역이어서 

사진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글로써라도 설명해 보자면 이 방은, 

사실 별 것 없는 방이다. 

아랍풍으로 잔뜩 장식품이 전시된 것도 아니고, 

그저 벽에 원근법으로 아랍식 궁전의 
풍경을 그려 넣은 것이다. 


미술사에 관한 책을 한두 권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원근법은 사실 ‘눈속임(trompe-l'oeil)’이라고도 불리웠다.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면, 

과연 3차원적인 원근법으로 그린 그림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아니면 마치 만다라나 터키의 양탄자, 
이집트의 부조와 같이 

2차원적인 그림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인가?

실제로 기둥들이 줄지어 서있을 경우, 

우리 눈에는 기둥이 멀어질수록 
기둥 간의 간격은 좁아지고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길이도 줄어들게 되지만,

실상 진짜로 기둥이 줄거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원근법, 
다시 말해 ‘눈속임’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키치적인 모방일 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페나 궁전의 ‘아랍의 방’은

아랍 풍의 완벽한 방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아랍식 궁전에서 바라본 풍경을 모사한 것이라면

(마치 햄버거집 건물을 햄버거 모양으로 짓는 것과 같이)

키치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리스본에 있는 사흘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든 이유였다. 

키치, 혼성모방, 그리고 키치적인 혼성모방.


키치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못하는 나로서는

리스본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구나, 
라는 새로운 깨달음.

그리고 그 키치적인 양식이 
한편으로는 리스본이 살아남는 방식이었으며

그런 전통으로부터 문화적인 저변을 
넓혀왔음을 새삼 깨닫고, 

리스본이 조금은 편해진다. 




페나 궁은 입구에서 궁전까지 거리가 꽤 된다. 

그리고 오르막이다. 

그러니 올라갈 때나 혹은 내려올 때 한번쯤은, 

궁전의 입장료를 내면 무료로 탈 수 있는 
이 버스를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리스본 카드가 있으면 입장료를 할인해 주는데, 

입장료 체계가 조금 복잡한 듯 하지만 
가장 비싼 것(!)을 끊으면 

크게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리스본에 대한, 포르투갈에 대한,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과 중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움베르토 에코가 이르길, 
포스트 모더니즘은 일종의 ‘新 중세’라고 했다던가)

이제는 이번 여행의 진정한 목표였던 

대륙의 끝, 
호까 곶을 향해 움직이기로 한다. 


2009. 9. 15. Tue. 


신트라 궁에서 무어인의 성을 올라가는 건

사실은 바보 짓이다,

나는 잘 몰라서 그렇게 했지만.


신트라를 편하게 구경하려면 

페나 궁 - 무어인의 성 - 신트라 궁의 순서로 
돌아보는 게 낫다. 

왜냐하면, 위의 순서가 높이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래에서 올라가느니 
위에서 내려오는 게 편한 법이다. 


더군다나 내 경우, 

사람들이 많이 찾는 무어인의 성 정문(?)이 아니라

뒷길인 산길(산타 마리아의 길)을 통해 가는 바람에

왼쪽 무릎의 관절염이 도질 뻔 했다. 


하지만 여행은 모름지기 길을 잃는 것, 

길을 잃어보지 않았다면 제대로 여행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길을 잃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되기 마련.



글쎄, 약수터라고 해야할까?

이렇게 물을 받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 않아

셔터를 누른다, 소심하게.

이방인의 눈이 신경 쓰이는 건 저들도 마찬가지.

서로 힐끔힐끔거리는 모습이 아마 
제3자가 보기에는 좀 웃겼을 터.


그리고 이 약수터를 끼고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아래와 같은, 
산타 마리아 산책로의 입구가 나온다. 

아치 모양의 입구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일종의 회전문이 나오는데, 

이 회전문의 기원이 언제적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산책로(라기보다는 산길)에는 

우리나라의 산길에 각종 산악회에서 길을 표시해놓는

리본이 나뭇가지마다 달려있듯이, 

길을 안내하는 독특한 표기법이 눈에 띈다.

아래와 같이 “=” 표시이면 이 길이 맞다는 것이고,

x자로 표기되어 있으면 길이 아니라는 표시.

그리고 아랫쪽의 빨간 줄이 "┌" 모양이면 왼쪽, 

"┐" 모양이면 오른쪽 길이라는 표시. 

단순명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한 번 잃은 나는... 
할 말 없음이다.)



그리고 이 길을 오르다 보면 

아래와 같은 장면, 

즉 유적 발굴 및 복원 작업을 하는 장면들을 마주치게 된다. 

역사가 오랜 만큼 

여전히 무어인의 성은 탐구의 대상인 것.



아무튼 한참 산길을 올라 
드디어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에 도달한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은 

포르투갈을 점령한 무어인들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지금의 성은 19세기에 리노베이션을 거친 것이라고.

이를테면 크리스트교 세계와 아랍 세계의 

문명의 충돌이 빚어낸 걸작이라고나 할까.





이 성이 독특한 것은 

큰 바위들을 제거하고 터를 닦아 세운 것이 아니라

그대로 놔둔 채 
지형지물을 성의 일부분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놀라운 것은 

이 성을 쌓은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이 성을 공격해 빼앗은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는 것. 

그만큼 만만치 않은 높이에

만만치 않은 경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탑에서 탑으로 걸어가면서 

그 경치에 황홀해 진다. 

아울러 탑마다 제각각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데, 

각각의 깃발은 과거 포르투갈의 왕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래의 깃발은

‘신트라’를 아라비아 글자로 표기한 것. 

이 성의 기원을 확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아르누보의 장식처럼 

이국적으로 생긴 이 나무 역시 

남쪽 어딘가에서 건너왔을 법하다. 



그리고 멀리, 
페나 궁전의 실루엣이 보인다. 

(광각렌즈로 찍어서 더 멀리 느껴지는 탓도 있지만.)




여행 일정이 번거롭다고 빼놓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

무어인의 성을 뒤로 하고

이제 동화속 공주가 사는 곳과도 같은

페나 궁으로 이동한다.

마지막으로 성곽의 사진 두 컷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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